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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나들이 - 문화재

논개생가 (論介生家)

by 똥벼락 2006.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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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介生家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 위치해있다.

 

 논개는 선조 7년(1575년 9월 3일)에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위태롭자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진하여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나라와 부군(夫君)의 원수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 순절한 의암 주논개의  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20,000여평의 부지에 50억원을 투자한 논개생가 복원사업이  2000년 9월 완료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생가지가 있는 지역은  덕유산, 오동제등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장안산 군립공원과 지지계곡, 동화댐을 연계한 등산 코스가 열려 있어 논개생가와 연계한 관광코스로 손색이 없으며, 연중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다

 

 

 

論介

 

 ?~1593(선조 26)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 1593년(선조 26)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최경회·황진·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1721년(경종 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으며, 1739년(영조 15) 무렵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
 
 
 

     ▲ 논개생가지 입구
 
 
 

     ▲논개 생가지 입구앞의 매점과 광장
 
 
 

 
 
 
 

 
 
 
 

     ▲ 생가지로 오르는 길과 논개상
 
 
 

     ▲ 논개상
 
 
 

     ▲ 창고
 
 
 

     ▲ 생가
 
 
 

     ▲ 생가 안방
 
 
 

 
 
 
 

     ▲ 논개 영정
 
 
 

     ▲ 생가에 걸린 옥수수
 
 
 

     ▲ 부엌 입구
 
 
 

     ▲논개 부모(주달문, 밀양박씨) 묘소 가는 길
 
 
 

    
 
 
 

     ▲ 생가 전경
 
 
 

     ▲ 논개 부모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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