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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나들이 - 문화재

논산 관촉사(灌燭寺)

by 똥벼락 2006.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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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灌燭寺)

 


     ▲ 관촉사로 가는길

 


     ▲ 관촉사


 논산 시내에서 약 3Km 떨어진 반야산(100m)기슭에 위치한 관촉사는 대한불료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고려 광종 19년에 혜명(慧明)스님에 의해 창건될 때 조성된 석조미륵상이 발산하는 빛을 좇아 중국에서 명승(名僧) 지안이 와서 예배를 했다고 해 관촉사라 했단다. 

 

 

 

●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8호

소재지 : 충청남도 관촉동

시   대 : 고려시대

 


     ▲ 석조미륵보살입상

 


     ▲ 관음전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창을 통해 미륵불을 볼수 있도록 해뒀다.

 

 높이가 19m, 둘레 9.2m, 귀 길이 2.7m 눈썹 사이 1.8m 큰 갓의 가로 3.3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석불로서, 보통 '은진미륵'이라 불리고 있다. 미륵불은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에 그 때까지도 구제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나타난다는 미래불로 대개 산이나 들 등 바깥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상은 몸통에 비해 특별히 얼굴이 강조되어 전체적인 균형미는 약간 떨어지지만 불상(佛像)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원초적인 힘은 고려시대 초기에  이 지방에서 많이 유행하는 불교예술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얼굴과 손에 집중된 표현양식은 마치 토속적인 신상(神像)을 보는 듯 위압적이며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강한 메시지와 신비감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에 완성하였으며, 혜명대사가 대형 석불을 만들어 세울 수 없어 걱정할 때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기뻐하며 돌아와 불상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거석불(巨石佛)의 대표적인 예로 인근에 있는 부여 임천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는데, 이 두 불상은 고려시대에 충남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불상의 양식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관촉사 불상의 건립은 이후 충남 각 지역에서 거불상의 조성에 큰 계기가 된 듯 하다.

 

 

 

● 석조미륵보살에 대산 설화~

 

 관종19년 반야산 사제촌이란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보니, 갑자기 큰 바위가 솟아나왔다. 이 일을 조정에 알리니 '부처를 조성하라는 뜻'이라 하며 금강산에 있던 혜명스님을 불러 부처 조성 명을 내렸다. 석공 100여명을 거느리고 솟아나온 바위로 허리 아랫 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얼굴 부분은 그곳에서 약 12km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 1000여명의 인부를 동원해 옮겨왔다. 하지만 만들어둔 허리 아랫부분이 너무나 커서 머리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이 밑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아 올려 덮고, 그 위 부분을 올리고, 다시 모래를 쌓은 뒤 가장 윗부분을 올려놓으며 흙장난 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서 부처를 완성 할수 있었다 한다.

 

 부처가 완성된 후 신기한 일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고려후기 거란이 침입하여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 어느 중이 얕은 내를 건너듯 압록강을 건너자, 그 뒤을 따른 거란의 대군도 강이 얕을거라 생각하고 따랐으나 강물이 어찌나 깊던지 거의 몰사되었다 한다. 이에 대장이 크게 노해 중을 칼로쳐 갓 한쪽을 베었는데 그와 동시에 이 부처의 갓도 한쪽이 바위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떨어진 부분이 전혀 깨지지 않아 조선 숙종때에 다시 붙였다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순종 3년. 일제 감정기 무렵 일본 사람 셋이 불공을 드린다며 관촉사를 찾았다. 이중으로 갓을 쓰고 있는 부터의 큰 갓 위에 금동화불이 있었는데 그들이 금동화불 모두를 힘쳐 갔고 부처 이마에 있던 광명주까지 깨뜨려 버렸다. 그 후로는 은진미륵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 관촉사 석등

보물 제232호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시   대 : 고려시대

 


     ▲ 석등

 


     ▲ 지대석 기둥 중간에 대마디 모양을 새기고

         네 잎 꽃 여덟 송이를 조객해뒀다.

 

 석등이란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 불성(佛性)을 밝혀 주는 등인데, 처음에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으나 후대에는 불전(佛殿)이나 탑 앞에 설치하는 장식적인 건조물로 변했다. 정사각형의 하대석(下臺石)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다. 기둥돌(竿石)은 둥근 형태의 상ㆍ중ㆍ하 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네 기둥이 빈약한 반면 화창(火窓)이 매우 넓다. 1ㆍ2층 지붕 돌의 네 귀에 귀꽃이 큼직하게 서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ㆍ8각이 혼합되어 구성되었으며,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또한 화사석의 기둥이 가늘어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형태의 장대함과 수법의 웅장함이 고려시대 제일가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사적비에 의하면 불상이 968년(고려 광종 19)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석등의 대표작이다.

 

 

 

● 배례석

유형문화제 제53호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시   대 : 고려시대

 


     ▲ 부처에게 제물을 바칠 때 쓰였던 배례석


  부처님께 예(禮)를 올리던 곳에 놓은 직사각형의 받침돌(臺石)로 바닥에서 2단의 직각 괴임을 새기고, 그 사방의 면석(面石)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 새김하였다. 연꽃은 단판(單瓣) 8엽(葉)이며 중앙에는 커다란 둥근 자리(圓座)가 있고, 그 안에는 가운데 1개와 그 주위에 8개의 자방(子房)이 연주문(蓮珠文)처럼 돌려져 있는데 음각(陰刻)으로 새겼다. 연꽃의 잎 끝이 뾰족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重辦)의 연꽃잎을 뾰족하게 돋을 새김하였다. 제작연대에 대한 이설(異說)이 많으나 제작기법으로 보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 오층석탑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등

시   대 : 고려시대

 


     ▲ 오층석탑

 

 배례석 옆에는 높이 4.5m, 둘레 3.6m의 오층석탑이 있다. 기단부는 비교적 낣게하여 이중기단으로 5층을 올렸다. 몸돌의 높이에 비해 지붕돌이 그리 넓지 못해 위로 올라갈수록 왜소한 느낌이 든다.

 

 

 

● 석문

문화재자료 제79호

조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시   대 : 조선시대

 


     ▲ 석문

 


     ▲ 석문과 관음전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맨 위쪽에 세워진 석문으로, 사찰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라는 뜻의 해탈문(解脫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문 입구의 양쪽 돌기둥은 너비 48m인 직사각형의 돌을 양쪽 기둥으로 세웠고, 웟면 천장에는 길게 다듬은 돌 5개를 가로로 걸쳐 얹어 4각형의 천장을 이루어 마치 터널의 모습과 비슷하다. 천장 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재를 다음어 벽돌 쌓은 형식으로 쌓았으며, 입구의 양옆으로도 벽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하는 석벽(石壁)의 모양을 내었다. 이 석문은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이다. 제작 축조 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시대에 조성한 사찰내의 석조미륵보살입상과는 관련이 없는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윤장대

 


     ▲ 소백산 용문사의 윤장대를 똑같이 재현한 관촉사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관촉사 윤장대는 소백산 용문사(경북 예천)에 있는 보물 제 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윤장대를 세운 목적은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고 한다.

 

 

 

 

● 반야산 장승공원

 


 



 장승은 우리민족과 더불어 살아온 민속 문화로 외래문화에 쉽사리 동화되거나 흉내내지 않고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온갖 세속적인 희노애락의 감정을 압축적은 조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의 성기 숭배에서 나온 것,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에서 나온 것,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立石)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장생(長生), 장승(長丞, 張丞, 長承)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 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이 있다.
 장승의 기능으로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이정표 구실, 수호신 역활 등이 있으며, 사낭당, 산신당, 솟대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여, 액운이 들었을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에는 제사를 지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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