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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나들이 - 문화재

한산도 이충무공유적 (閑山島 李忠武公遺蹟)

by 똥벼락 200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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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이충무공유적 (閑山島 李忠武公遺蹟)

     ○ 사적 제113호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뒤 제승당을 짖고 1593년(선조 26) 부터 1597년(선조30)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어 제해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유서 갚은 사적지이다.

 

 제승당은 1597년 폐전되어 142년 후인 1739년(영조15)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운 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여러차례 보수하여 왔으나 민족의 성웅을 모시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둘러본 후 공의 위업을 기리고 살신구국의 높은 뜻을 후손에 전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경역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1976년 온ㄹ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곳엔 공이 생전에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제승당을 위시하여 고의 존영을 모신 영당, 유허비를 비롯한 많은 송덕비, 사정, 수루 등 부속시설이 말끔히 다장되어 수려한 주변 경관과 더불어당시 조선 수군 본영의 면모를 되찾아 볼 수 있다.

 

 

      ▲ 한산도 도착 직전에 배에서..

 

 

      ▲ 한산도 선착장

 

 

 

 

      ▲ 제승당으로 가는 길에...

 

 

 ◆ 한산만 (閑山灣)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彌勒島)와 한산도(閑山島)사이의 내륙쪽에 있는 만 지형의 바다이다. 한산만의 남쪽은 통영만(統營만灣)으로 불리고 있다. 한산만은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모양으로 남서쪽에는 두억포(頭億浦)가 있고 남동쪽에는 고포(羔浦)가 있다. 한산만의 수심은 입구가 12~14m, 안쪽이 6~9m로 소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다. 한산만 남쪽의 통영만도 비슷한 지형이지만, 입구의 폭이 1.2km로 더 넓고 수심이 10m 이상으로 대형선박의 출입도 가능하다.

 임진왜란 때에는 두억포에 삼도수군(三道水軍)의 본영(本營)이 설치되어는데 전함(戰艦)인 판옥선(板屋船)인 척후선(斥候船) 100여 척과 740여 명의 조선수군이 주둔했다. 충무공은 이러한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하여 한산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작은 만과 포구들 크고 작은 섬들이 곳곳에 있는 한산만의 지형에 익숙지 못했던 왜군의 참패는 당연한 것이었다. 

 

      ▲ 한산만

 

 

 

  ◆ 우물(井)

 충무공이 한산도(閑山島)에 통제영(統制營) 제승당(制勝堂)을 정하고 1340일 동안 머물면서 병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이다. 바다에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고 수량도 풍부하여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물맛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 우물터

 

 

      ▲ 우물

 

 

      ▲ 우물

 

 

 

  ● 이 충무공 정신 (李 忠武公 精神)

1.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精神)  

2. 창의(創意)와 개척정신(開拓精神)  

3.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精神)  

 

     

 

 

 

      ▲ 충무문

 

 

     

 

 

  ●제승당 (制勝堂)

  운주당(運籌堂)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현대의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곳이다. 충무공은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한양(韓陽)으로 붙잡혀 각까지 약 3년 8개월동안 진영(陳營)을 여기에 설치하였다.

 승리(勝利)를 만드는 건물의 이름과 같이 왜적(倭賊)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도 짜고, 총통(銃筒)과 같은 신무기의 제작과 보급에 힘쓰는등 모든 군무(軍務)를 관장하던 곳이었다. 총 1491일분의 난중일기(亂中日記)중 1029일의 일기(日記)가 여기에서 쓰여졌고 많은 시(詩)를 남기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의 제승당(制勝堂)은 충무고이 떠난 뒤 폐허가 되었다가 1739년(영조 15)에 통제사(統制使) 조경(趙儆)이 중건(重建)한 것을 1976년에 다시 세운것이다.

 

      ▲ 제승당

 

      ▲ 제승당

 

 

 

  ● 수루 (戍樓)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서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이곳에 올라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했던 곳이다.

 또 이고에는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르산, 뒤쪽의 망산을 연결, 봉화. 고동. 연등을 이용하여 남해안의 적 동태르 파악하였다.

 이 건물은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을 통해 신축한것이다. 

 

      ▲ 수루

 

      ▲ 수루에서 본 한산만

 

      ▲ 수루에서 본 한산만

 

 

  ● 한산정 (閑山亭)

 한산정(閑山亭)은 충무공이 부하 무사(武士)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여기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정도로 활터와 과녁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위한 실전거리의 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진 편에서는 떡과 막걸리를 내어 배불리 먹었음이 여러차례 기록되어 이다. 활쏘기 훈련의 흥미와 무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충무공의 지혜였을 것이다.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무사들은 충무공이 1594년에 건의했던 무과특별시험에서 선발된 하삼도(下三道) [경상-전라-충청]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 한신정

 

      ▲ 활터와 과녁

 

      ▲ 활터와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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